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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선동열은 어느 정도였나? 선동열, 박찬호 

 
.스탯

클로저 투수들의 경우에는 투구이닝이 규정이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서 방어율로 투수를 평가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클로저의 방어율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구원 투수들의 가치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데이터로 Piching Runs라는 것이 있다. 다만 Piching Runs에서 부족한 점은 구원투수가 루상에 주자를 두고 등판하여 허용하는 실점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투수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루상에 주자를 두고 등판했을 대 실점 허용 여부까지 함께 따져 볼 필요성이 있다. 참고로 Piching Runs는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구해진다.


*Piching Runs 리그 평균 방어율 - 방어율 * 투구이닝 /9


 

그렇다면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던 97시즌 선동열은 어느 정도의 투수였을까? 이것은 선발 투수가 선동열과 동급의 Piching Runs를 기록하려면 어느 정도의 성적을 기록해야 하는지를 구해보면 된다. 여기에서 비교를 쉽게 하기 위하여 선발 투수가 200이닝 정도를 투구한다는 전제하에 어느 정도의 방어율을 기록하면 되는지 알아보았다.


*97시즌 선동열의 Piching Runs = 200이닝 방어율 3.03 선발 투수의 Piching Runs


선동열의 Piching Runs는 리그 15승급 선발 투수들의 그것을 웃도는 성적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선동열의 라이벌이었던 사사키는 어느 정도였을까?


*97시즌 사사키의 Piching Runs = 200이닝 방어율 2.98 선발 투수의 Piching Runs


선발투수의 그것으로 따진다면 선동열과 사사키의 차이는 이 정도였다. 당시 사사키는 리그 최강 타선이었던 요코하마에 소속이었고, 선동열은 꼴지팀 주니치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방어율 2.98과 방어율 3.03의 차이가 의미가 있을까? 당시 세이브 숫자는 똑 같이 38세이브였으며 세이브의 질적인 면(세이브 성공율, 롱 세이브, 터프 세이브)이나 루상에 주자를 두고 등판했을 때 실점을 허용하는 비율은 선동열이 사사키보다 훨씬 더 우수했다.  97시즌 센트럴 리그의 최고 투수는 18승으로 다승왕을 먹었던 주니치의 야마모토였다. 당시 야마모토의 성적은 18승에 206.7이닝, 방어율 2.92였다. 이해에 3.03보다 낮은 방어율을 기록한 선발 투수는 센트럴리그에 5명이 있었지만 135.7~174.3이닝이었다. 이 해에 선동열이 기록한 Piching Runs는 리그 15승급 투수들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야마모토에 다소 못 미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Piching Runs에 반영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투수들이 루상에 남겨놓는 주자들이다. 이 점에서 센트럴리그 최고 투수인 야마모토는 선동열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투수였다. 야마모토의 18승 중에 선동열이 15번을 세이브 했으며, 선동열은 야마모토가 루상에 남긴고 들어간 주자들의 대부분을 무실점으로  마무리해주었다. 그해 선동열이 루상에 주자를 두고 등판했을 때 주자들에게 실점을 허용하는 비율은 10%정도였다. 이해에 선동열이 등판했을 때 앞에 투수들이 남겨놓은 주자들의 수는 무려 20명이었다. 이 부분은 사사키보다 훨씬 우수한 부분이라고 슈칸 베이스볼에 의해서 보도되기도 했다. 만약 선동열이 루상에 주자들에게 많은 실점을 허용했다면 자신의 방어율은 까먹지 않지만 야마모토를 비릇하여 전체적인 팀방어율은 상승하게 된다. 야마모토가 3.03보다 더 낮은 2.92의 방어율을 기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선동열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까지 감안한다면 97시즌 선동열은 사실상 센트럴리그 최고 수준에 오른 투수였으며, 당시 리그 야마모토급 이상의 가치를 지난 투수였다. 그렇다면 당시 선동열을 메이저리그 투수들과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의 투수였을까? 참고로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를 모두 경험한 일본 투수들을 대상으로 전체 평균을 내면 일본에서 조정 방어율+ 수치가 100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 93정도를 기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나 구원 투수들의 경우에는 이 차이가 훨씬 더 적으며 오히려 메이저리그에서 더 좋은 조정 방어율+를 기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볼 때 97년 당시의 선동열은 한창 전성기때 트레버 호프먼이나 에릭 가니에급 투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벨로시티>

95년에 최고구속 155Km를 기록했던 선동열의 강속구는 96년 당시 평균 3~4Km의 구속이 감소되었다. 하지만 97년 당시에는 최고구속을 154Km까지 끌어올리면서 전성기의 위력을 회복했다. 97년 당시 선동열의 볼은 일본프로야구 투수들 중에 가장 빠른 것이었다. 연투로 구속이 떨어지거나 2이닝 정도의 투구를 할 때에도 빠른볼은 꾸준히 146~148Km정도를 뿌렸으며 1이닝 전력투구를 할 때는 빠른볼의 구속이 147~151Km정도를 형성했다. 특히나 드롭 앤 드라이브 스타일에 의한 최대한의 보폭, 왼쪽 무릎까지 가슴을 당기는 투구폼으로 인하여 릴리스 포인트와 홈플레이트 간에 거리는 더욱 좁아진다. 그로 인하여 최고구속이 154Km에 이르는 선동열의 강속구는 타자 입장에서 160Km에 육박하는 볼을 상대하는 것과 같은 위력이었다.  


<무브먼트>

당시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솟구쳐오르는 볼끝은 일본 최고였다. 선동열의 높은 속구는 무서울 정도로 힘차게 솟구쳐오르고, 우타자 몸쪽 속구는 빨려들듯이 휘어져 들어갔다. 또한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통한 승부의 비율이 리그 최고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3.3이닝에 무피홈런을 기록했다. 이로 인하여 볼끝이 살아있는 선동열의 속구는 당시 일본에서도 "절대 홈런을 허용하지 않는는 강력한 직구"라는 극찬을 받았다. 당시 선동열의 속구를 특별한 명품으로 여겨서 "선 파워 스트레이트" 또는 "초직구"라는 특별한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로케이션>

9이닝당 볼넷은 1.7개에 불과하면서도 탈삼진은 이닝당 1.09개로서 탈삼진 대 볼넷은 5.75:1이었다. 일본의 스트라이커 존에 완벽하게 적응하였으며, 또한 스트라이커 존에서 살짝살짝 벗어나는 유인구를 완벽하게 구사하여 효과적으로 타자를 제압했다. 원래 선동열은 구위가 너무 위력적이라서 유인구보다는 코너웍을 통한 스트라이커로 정면 승부를 거는 스타일이었는데, 이 당시에는 유인구에 대한 제구력까지도 최상급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시즌이다.


<구질>

패스트볼 비율이 70~80%, 슬라이더가 15~20% 정도였으며 가끔씩 싱커나 슬로우 커브를 구사했다. 반면 체인지업으로 볼 수 있는 구질은 거의 던지지 않았다. 당시 선동열의 패스트볼은 구속, 무브먼트, 로케이션 모든 면에서 일본프로야구 최고였다. 그렇기에 결정구를 패스트볼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강력한 패스트볼을 뒷밤침하는 보조 무기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전성기 당시의 위협적인 구속에 완벽한 제구, 혀를 내두르는 변화는 아니었지만 타자들이 속구의 타이밍을 맞추려 애쓰다가 오프 스피드 피치로 구사된 슬라이더나 커브에 번번히 당했다.


P.S 95시즌이 끝나고 선동열의 해외 진출이 결정되었는데, 당시 평가는 선발로 15승 이상, 구원으로 30세이브 이상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동열은 97시즌 당시 분명히 그 기대치 이상을 해냈다. 97년 선동열은 95년에 버금가는 볼 스피드를 과시했었는데, 일본에서 이 정도의 볼을 뿌렸던 시즌은 97년이 유일하다. 또한 95년 당시 선동열의 Piching Runs는 당시 리그 15승급 투수들의 그것보다 더 우수했지만 20승 투수급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또한 실제로 86년 선동열은 95년 선동열보다 Piching Runs에 있어서 두배 정도가 더 우수한 투수였다. 선동열은 젋은 시절에 네무도, 장명부, 김일융 등으로부터 일본에서 20승 투수가 될 수 있는 실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근데 국내에서도 20승을 할 수 있는 시절이 지난 시점에서, 일본에 가서 당시 센트럴리그 최고 투수였던 야마모토 못지 않은 가치를 지난 클로저로서 맹활약했다. 네무도나 장명부, 김일융의 말이 결코 립 서비스가 아니었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 거 아닌가?